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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동계전투 '장진호전투'ㅣ넷플릭스

by 아트래블* 2019. 6. 6.

세계 3대 동계전투이자 6.25 한국전쟁의 분수령이었던 '장진호전투'ㅣ넷플릭스

: 장진호(長津湖) 전투 ; '어딘지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는 한국, 한국 사람들' 을 위해 희생한 이들의 이야기

 

 

 

장진호(長津湖) 전투 - 1950년 11월~12월,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함경남도 장진군과 함주군 일대에서 북쪽으로 진출하던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포위망을 형성한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과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한 맞붙게 된 동계 철수작전을 말한다. 

 

세계 3대 동계전투 

또한 장진호 전투
2차 세계대전의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함께
세계3대 동계전투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유엔군과 국군 북진. 1950년 11월 27일 한반도 북동부 전선. 자료: <6&middot;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장진호 전투 위치. 1950년 11월 27일 ~ 12월 11일 자료: <6&middot;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안재철 저)

 


 

 

2021.10.04 update.

 

최근 중국 시점으로, 그것도 중국에서 만들어진 만큼 철저하게 중국적인 시선으로 해석한 '장진호 전투' 영화가 중국에서 흥행 중이라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사실 영화 '장진호'는 개봉 전부터 중국내에서는 화제가 된 영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패왕별희'의 천카이거, '서극'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쉬커, 유명 홍콩 영화감독 단테 람 등 중국 본토와 홍콩의 거장 3명이 공동으로 연출했기 때문이다.

 

천카이거 감독은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 부분을, 쉬커 감독은 스토리의 완결성과 디테일한 부분을, 단테 람 감독은 전투 장면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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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는 이 장진호 전투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판초우의를 껴 입은 미군들이 혹독한 추위 속 눈을 맞으며 조심스레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모습을 그대로 잘 나타내고 있다.

 

장진호 전투 넷플릭스
버지니아주의 미 해병대박물관에 들어선 장진호전투기념비

 

 

장진호(長津湖) 전투는 6·25전쟁에서 미군의 피해가 가장 컸던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한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 속에서 벌어졌는데 그 추위는 휘발유와 윤활유까지 얼어서 무기와 차량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정도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전투였다” 라는 평을 듣는다.

 

장진호 전투 넷플릭스

 

 

당시 전황은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밀어붙이고 있던 상황으로 종전을 눈앞에 둔 유엔군에 매우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북한 정권의 붕괴는 시간문제라고 여겨졌던 때로 미군들은 그 해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던 상황이었다. 

 

넷플릭스 장진호 전투

 

 

유일한 변수가 있다면 중국이 이 전쟁에 개입할 것인지 여부였는데, 중국의 대규모 개입 여부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부정적인 전망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예상과 달리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을 계속하던 유엔군이 김일성 정부의 임시 수도였던 평안북도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장진호 일대까지 진격했다가 무려 12만 명에 달하는 중국군에 포위되고 말았던 것이다.

 

 

넷플릭스 장진호 전투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정권을 수립한 지 1년 여 밖에 안 된 신생 중국이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기는 힘들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었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중국은 40만 명이 넘는 군대를 북한에 이미 투입한 상태였는데, 철저하게 밤에만 이동해 미군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넷플릭스 장진호 전투
초신은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 해병 1사단은 험준한 개마고원의 깊은 산중을 헤치며 북한의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 9병단은 이런 미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유엔군 전체 병력의 수는 7만 5천여 명이었고, 장진호 일대에서 고립된 유엔군 병력은 1만 5천여 명이었다.

 

 

넷플릭스 장진호 전투

 

 

그렇게 미군을 장진호 주변에서 완전히 포위하는데 성공했고, 미 해병 1사단은 함경남도 개마고원에 있는 인공 호수인 장진호(長津湖) 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채 영하 20~30도의 혹한을 버텨야 했다.

 

당시 미군 병력은 약 1만 5천 여 명, 중국군 9병단은 7개 사단 12만 명으로 병력의 차이도 컸지만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당한 기습 포위 공격으로 미군은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하게 된다.

 

 

넷플릭스 장진호 전투

 

 

전투 사망자 숫자는 통계에 따라 엇갈리는데 미군 사상자는 총 7천여명이 넘었으며 이 가운데 사망자는 3천 6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유엔군 전체적으로 보아도 장진호 전투에서의 유엔군 사상자는 1만 7천여 명이나 되었다.

 

물론 중국군의 피해는 더 컸다. 4만 8천여 명이 죽거나 다쳤는데,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 숫자(1만 9천여 명)보다 동상 등 비전투 요인으로 발생한 사상자 숫자(2만 8천여 명)가 더 많았으니 말이다.

 

 

넷플릭스 장진호 전투

 

 

참고로, 한미연합사령부가 발간한 장진호 전투 관련 자료에는 "미 해병 1사단이 전사 718명, 후송 후 사망 98명, 실종 192명, 부상 3504명이었고 비전투 손실 3659명의 대부분이 동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넷플릭스 장진호 전투

 

 

미군이 한 전투에서 이렇게 많이 죽은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더구나 해병 1사단은 미군의 정예 가운데 정예였었다.

 

워낙 피해가 컸기 때문에 당시 미국 뉴스위크는 이 전투를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미군 사상 최악의 패배" 라고 보도했으며, 미군 해병대사에서도 장진호 전투는 미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라고 기술돼 있다. 

 

 

넷플릭스 장진호 전투

 

 

 

그렇게 한국전쟁의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던 미군은 이 전투를 계기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자기들보다 병력 수에서 10배에 가까운 중국군의 기습 포위 공격을 뚫고 성공적으로 후퇴작전을 했고, 17일 동안 중국군 대병력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군이 일방적으로 패배했다고는 할 수 없는 전투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에게는 붕괴 일보 직전에 있던 북한 정권을 기사회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이 이 장진호 전투이기에 그 결과가 너무나 아쉽기만 하다.

 

 

 

넷플릭스 장진호 전투

 

 

결과적으로 미군은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내려와 집결한 ‘바다 쪽’은 바로 흥남이었던 것이다. 

 

흥남 철수 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미군이 이곳에 몰린 피난민을 함정과 수송선에 태워 남으로 내려 보낸 세계 전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작전이었다.

 

 

넷플릭스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참전용사들 6000여 명은 1983년 4월 `초신 퓨(Chosin Few)`라는 생존자협회를 결성했다. 초신은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이고 `Few`는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가 적다는 의미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1일까지 17일 간에 걸쳐 전개한 장진호 일대에서 치러진 이 철수작전 및 전투와 관련해 미군 최고의 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이 17개가 수여됐다. 중공군 사상자도 4만 5000명 이상이었다.

 

 

버지니아주의 미 해병대박물관에 들어선 장진호전투기념비

 

 

장진호 전투기념비에는 ‘장진(초신)호수 전투’로 영문 표기돼 있다. 

 

원래 미국 내에선 장진호 전투가 일본식 표기인 초신(Chosin) 전투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한국전쟁 당시 일본이 만들었던 지도를 미군이 사용하면서다. 하지만 기념비를 건립하면서 한국 측의 요청으로 공식 이름에 장진(Jangjin)을 명명했다.

 

북한에서도 장진호 전투는 유명하다. 이 전투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장진호 전투 이후 미군 포로들 가방 속에는 신기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바로 놋그릇과 수저들이다. 당시 미군들 사이에선 한반도에 금(金)이 많다고 소문났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미군들은 전리품(戰利品)으로 놋그릇과 수저를 챙겼다. 누런색을 띤 놋그릇들과 수저들이 미군 눈에는 금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인민군에게 잡힌 미군 포로들의 가방에는 놋그릇과 수저들이 항상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 장진호 전투에 대한 웃기지만 슬픈 사연들이 있다.

  

 

장진호 전투가 끝난 뒤 혹한에 죽은 미군 유해들이 있었다고 한다. 주변 마을 사람들은 죽은 미군 주머니에서 화폐 모양의 종이들을 수거했다. 그 종이에는 사람 얼굴도 그려져 있었고, 글씨도 있었다. 그들은 그 종이를 벽지와 장판지로 사용했다. 몇 해 후 공부하러 평양에 갔던 청년이 집에 돌아와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집집마다 벽에 달러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마을 주민들이 미군 유해(遺骸)에서 꺼낸 종이가 달러였던 것이다. 그것이 달러인지 몰랐던 마을 주민들은 질 좋은 종이로 생각하고 벽지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다.

 

 

장진호(長津湖) 전투 -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 나온 내용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 목적과 병력규모를 11월 초까지도 경시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가 선제공격을 단행하기로 결심함에 따라 동부지역을 담당한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은 국경선을 목표로 한 북진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1일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1군단을 우측,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제1해병사단을 좌측으로 하여 국경선으로 진격하는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은 미 제10군단 정면에 제9병단을 투입하고 있었다. 제9병단은 예하에 제20군단과 제27군단, 제26군단을 두고 있었다.


11월 27일 중공군이 유담리의 미 해병대를 공격하며 전투가 개시되었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장진호 지역의 전황이 급변하자 미 제10군단장은 11월 30일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기존의 북진계획을 재검토하였다. 회의에서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한다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유담리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에 미 제1해병사단의 제5연대와 제7연대가 각각 이를 격파하고 12월 4일 하갈우리에 진입함으로써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서 고립된 미 제7사단은 구출이 지연되자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하갈우리로 이동하였다.


하갈우리에 대한 공격은 중공군 제58사단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또한 중공군 제60사단은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하여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 제1해병사단의 분전으로 12월 7일 고토리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지역에 모두 진입함으로써 장진호전투를 마무리하였다.
장진호전투는 여러 측면에서 전선에 영향을 주었다. 


중공군은 장진호 부근 전투에서 전투손실 뿐 아니라 비전투손실도 상당히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더 이상의 군사작전 수행이 불가능하여 중공군 제9병단 지휘부는 3개월에 걸쳐 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반면에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망을 돌파하여 함흥지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공군 제9병단이 서부전선의 제13병단을 증원할 수 있는 역량을 소멸시킴으로써 서부지역 전선의 미 제8군이 위기를 모면하는데 일조하였다.

 

 

참고문헌
『6·25전쟁사 7 -중공군참전과 유엔군의 철수』(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10)한국전쟁  (국방군사연구소, 1996)
East of Chosin(Roy Appleman,Texas A&amp;M University Press,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