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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by 아트래블* 2019. 1. 2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하룬 파로키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독일 영화 및 비디오아트의 거장 하룬 파로키 회고전


편하게 누워 미술작품을 볼 수 있다면.. 

또 그런 곳이 있다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가면 그런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전시개요]


국립현대미술관은 영화와 세계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혁명적인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던 현대영화사의 중요한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로 재구성해 소개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필립 가렐, 찬란한 절망>(2015), <요나스 메카스 – 찰나, 힐긋, 돌아보다>(2017)를 개최하였다. 2018년 올해는 강대국의 패권경쟁 구도 속에서 요동치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정세, 전체주의의 망령들이 출현하는 오늘의 세계 속에서 독일 작가 하룬 파로키의 비판적 해체의 목소리를 불러오고자 한다. 독일의 영화감독이자 미디어아티스트인 하룬 파로키(1944-2014)는 세계를 지배하는 이미지의 작용방식을 통찰하고 미디어와 산업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폭력성을 비판하였다. 그는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현상들의 배후를 치밀하게 조사하고 현 세계를 지배하는 힘에 편승한 이미지의 실체를 추적하면서 영화가 반이성의 시대에 이성을 회복하는 역할을 하길 바랐다. 이번 개인전은 이미지로 구현된 매체실험을 통해 노동, 전쟁, 테크놀로지의 이면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하룬 파로키의 작품들로 구성된다.


ⓓ 기간 2018.10.27 - 2019.04.07

ⓦ 장소 서울 6,7 전시실, 미디어랩 (작품수 9점)

ⓜ 관람료 서울관 관람권 4,000원



국립현대미술관 - 하룬 파로키



[전시구성]


<평행 I – IV>(2012-2014) 시리즈는 컴퓨터그래픽 이미지와 같은 이미지 재현 기술의 분석을 통해 현실과 이미지의 관계를 인식론적으로 접근하게 한다. 초기 컴퓨터 게임을 구성한 그래픽 이미지로부터 시작해 보다 정교하게 현실 이미지에 가까워지거나 가상세계 구축까지를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비디오 게임 이미지는 영화의 관찰 이미지와 달리 특정한 알고리즘에 의해 게임의 규칙을 만들며 영화를 감상할 때의 감정이입과 다른 형태의 체험을 만들어낸다 하룬 파로키가 ‘인간과 배경 사이의 중간에 존재하는 상호매개적 존재들’이라 부르는 게임 속 아바타를 통한 조정의 세계는 선택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완벽한 조정자가 되지 못하는 인간의 모순을 가시화한다. 


<인터페이스>(1995)는 하룬 파로키가 처음으로 전시를 목적으로 제작했던 작품으로 자신의 에세이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편집실의 모니터 두 대로 재생하면서 이미지의 배열과 편집, 인접한 두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비교, 분석한다. 하룬 파로키는 영화를 통해 분절되고 배열되면서 의미를 생산하는 이미지의 속성과 연관된 정치·사회적 배경의 담론화를 모색한다.


<110년 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2006)은 1995년에 만든 푸티지필름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12채널 모니터 설치 전시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필름카메라로 촬영한 최초의 기록영화 <리용의 뤼미에르 공장 문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46초간 보여준다. 하룬 파로키는 대중에게 공개된 이 최초의 영화를 모티브로 영화사 110년간 제작된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담긴 11개의 영화 및 푸티지필름의 조각들을 제시한다. 


<비교>(2007)는 수공업 형태의 노동이 생산기계의 발명과 함께 대량생산 체재로 변화하면서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게 되는 산업혁명의 과정 속에서 공존하는 노동의 여러 형태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전통적 방식으로 벽돌을 생산하는 아프리카와 인도의 노동자들과 첨단기계로 벽돌을 대량생산하는 유럽의 벽돌공장 이미지를 비교해 볼 수 있다.


<노동의 싱글 숏>은 하룬 파로키와 안체 에만이 2011년부터 시작한 워크샵 프로젝트로 하룬 파로키가 타계하기 전인 2014년까지 15개 도시에서 촬영됐으며 2017년부터 다시 시작해 3개의 도시가 추가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세계 곳곳의 노동현장을 분절이 없는 단일 쇼트로 촬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제작되었다. 이번 개인전에선 2017년에 제작된 세 개의 도시 중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추가하면서 16개 도시에서 제작된 영상들이 전시된다. 인위적 편집을 배제하고 다양한 형태, 장소, 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이미지는 정치적 선전이나 픽션의 재료가 아니며 특정 주제와 연관된 다큐멘터리의 부분 또한 아니다. 생존을 위해 일하는 16개 도시 사람들의 다양한 노동의 행태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은 익명의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극적인 이야기를 상상하기보다 인간이 공통으로 직면한 삶의 조건, 즉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 가깝다. 


<리메이크-공장을 나서는 사람들>은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나서는 사람들>처럼 12개 도시의 다양한 노동자들의 퇴근 모습을 기록한 프로젝트로 <노동의 싱글 숏>과 함께 업무가 끝나고 일터를 나서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노동의 단편적 기록인 이 이미지들은 영상으로 기록한다는 행위를 통해 우리의 시대, 지역, 역사, 순간을 사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국립현대미술관 - 하룬 파로키



"하룬 파로키는 노동, 전쟁, 테크놀로지의 이면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세계를 지배하는 이미지의 작용방식과 함께 미디어와 산업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폭력성을 끊임없이 비판해왔다." 


독일 영화감독이자 비디오 아트 거장 하룬 파로키(1944~2014) 회고전이 국내 처음으로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은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타이틀로 '노동의 싱글 숏', '인터페이스' 등 파로키 대표작 9점을 소개한다.


미술관에서 영화감독 작품 소개는 지난 2015년부터 진행했다. '필립 가렐', '요나스 메카스' 등 현대 영화사의 중요한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로 재구성하는 프로젝트다.


하룬 파로키는 노동, 전쟁, 테크놀로지의 이면과 함께 이미지의 실체를 추적해온 영화감독으로 이미 뉴욕 MoMA(2011), 런던 테이트모던(2009.2015), 파리 퐁피두센터(2017) 등에서 소개된 바 있다.


하룬 파로키는 1944년 인도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인도, 인도네시아를 거쳐 서베를린으로 이주, 1966년 첫 단편영화 '두 개의 길'을 선보이고 베를린 영화아카데미 1기 입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969년, 자신의 동지들인 볼프강 페터센, 귄터 페터 슈트라쉑, 홀거 마인스등과 함께 정치적 활동을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당한다. 


당시 하룬 파로키의 영화는 상황주의와 누벨바그, 다이렉트 시네마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1969년에 저예산영화 '꺼지지 않는 불꽃'을 제작했고 1970년대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를 영화화하며 ‘영화를 과학적으로, 과학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프로그램을 시도했다. 


또한 WDR텔레비전 채널에서 '글라스하우스'라는 이름의 TV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1973년 '이미지의 난점: 텔레비전 비평'이라는 제목으로 방송에 등장하는 단어와 이미지의 관계를 조사하면서 텔레비전 비평을 했다. 1979년에서 2000년까지 텔레비전 방송국의 제작지원으로 '당신의 눈앞에서 – 베트남'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만들게 되며, 1984년 폐간될 때까지 10여 년간 비평잡지 (필름크리틱)의 저자이자 편집자로 참여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은 하룬 파로키는 파시즘과 산업경제와의 관계를 조사하면서 '두 전쟁 사이에서', '이미지-전쟁', '세계의 이미지 그리고 전쟁의 각인'과 같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는 관찰자적인 다큐멘터리 방식을 거부하고 기존의 이미지들을 해체하고 분석하면서 이미지의 운동성과 그 속의 역사성을 읽어나갔다. 독일 독립영화계에 닥친 위기로 인해 독립영화의 배급도 어려워지기 시작한 1990년대에 하룬 파로키는 미술관의 전시형태로 그의 작품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1995년 '인터페이스'가 2채널로 전시된 것을 시작으로 1996년 ‘도큐멘타 X’에서 그의 작품 '정물'이 전시되었다. 



2000년대부터 하룬 파로키는 보다 본격적으로 전시를 목적으로 한 작품들을 많이 제작하기 시작했다. '비교',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과 같은 노동의 이미지를 배열한 작품, 산업, 군사, 기술, 세계정세가 연관된 이미지의 세계를 분석하는 그의 작품들이 세계 곳곳에서 전시형태로 소개됐다. 


그는 부인인 안체 에만 큐레이터과 함께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노동의 싱글 숏' 프로젝트를 15개 도시에서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그의 사후 이후 2017년부터 안체 에만에 의해 다시 촬영하여 3개의 도시가 추가되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노동의 싱글 숏'(2011-17)은 작가 생전에 제작된 15개의 영상과 더불어, 2017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추가로 제작된 영상이다. 


생존을 위해 일하는 16개 도시 사람들의 노동을 바라보며 인간이 공통으로 직면한 현실을 직시하게한다. 인위적인 편집이 배제된 하룬 파로키의 노동 이미지는 픽션이나 다큐멘터리로 분류되지 않으며 정치적 선전의 도구도 아니다. 작가는 '노동의 싱글 숏'을 통해 관람객들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노동 자체를 바라보게 한다. 


작가는 영화를 통해 의미를 생산하는 이미지와 이렇게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사회적 맥락을 지속적으로 분석해왔다. 


그가 처음 전시 목적으로 제작한 작품 '인터페이스'(1995)는 그의 에세이 다큐멘터리들을 2채널 모니터로 재생시켜 두 이미지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분석한다. 두 대의 모니터에서 보여주는 각기 다른 노동현장의 기록은 당시의 지정학적 맥락과 함께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말해준다. '평행 I – IV'시리즈(2012-14)는 컴퓨터 그래픽이미지를 분석하여 현실과 이미지의 관계를 조명한다. 


전시를 기획한 김은희 학예연구사는 "하룬 파로키는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현상들의 배후를 치밀하게 조사하고 현 세계를 지배하는 힘에 편승한 이미지의 실체를 추적하며 영화를 포함한 현대예술이 반이성의 시대에 이성을 회복하는 역할을 하길 바랐다"면서 "영화를 통해 이미지를 조합하고 해체하여 우리가 간과한 낯선 세계를 발견하게 해주는 파로키의 작품은 우리 삶의 조건들을 냉정하게 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소개했다.


MMCA 서울 6, 7전시실, 미디어랩에서 펼친 전시는 게임방이나 영화방처럼 연출됐다. 어두운 공간속 푹신한 의자도 놓여있어 편안하게 작품을 감상할수 있다.


전시와 연계하여 세계적인 영화학자인 레이몽 벨루(프랑스)를 비롯해 에리카 발솜(영국), 톰 홀러트(독일), 크리스타 블륌링거(오스트리아) 등의 강연이 진행된다. 11월 14일부터는 하룬 파로키의 영화 48편이 MMCA 서울 필름앤비디오(MFV) 영화관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 원문기사 http://www.ithemove.com/news/articleView.html?idxno=893


국립현대미술관 - 하룬 파로키

HOME ART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국립현대미술관 - 하룬 파로키

HOME ART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ㅣ하룬 파로키의 2014년작 <평행 2>의 한 장면. 사진처럼 정교해진 터 게임의 이미지 속성과 얼개를 뜯어본 작업이다.



HOME ART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ㅣ2006년 작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일부분. 1890년대 프랑스 리옹의 공장문을 나서는 당시 노동자들의 행렬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찍은 옛 동영상 일부를 근대, 현대 영화 속 노동자들의 퇴근 장면들과 함께 엮으며 노동자의 역사적 존재성을 되돌아본 수작이다.



HOME ART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ㅣ



HOME ART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ㅣ<꺼지지 않는 불꽃>, 1969



HOME ART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ㅣ<노동의 싱글 숏> 2011



HOME ART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ㅣ<비교> 2009



HOME ART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ㅣ<인터페이스> 1995



HOME ART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ㅣ<인터페이스> 1995



HOME ART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ㅣ<평행> 2012



많은 ‘덕후’들이 빠져든 컴퓨터게임이 어떻게 국가대표 미술관의 전시실에 들어왔을까.


요사이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지하 6전시실은 게임방과 다를 바 없다. ‘발광체’처럼 빛내며 입력된 이미지들을 쏟아내는 게임 이미지들이 네개의 대형 프로젝션 스크린에 명멸한다. 영상들은 왠지 불길하고 불편하다. 전사나 카우보이가 갑자기 총을 난사하거나 추격전을 벌이고., 벽이나 보이지 않는 경계에 부딪혀 제자리 걸음을 하는 사람, 길거리에서 청년이 행인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몸을 밀치며 괴롭히기를 되풀이하는 게임 영상들이다. 직접 게임에 참여할 수는 없다. 하지만, 푹신한 방석에 앉아 스크린 영상을 계속 올려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게 된다. 영상과 함께 낭랑한 영어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텍스트가 예사롭지 않다. ‘게임 속 세상은 평면이다. 그리스 시대 생각한 지구의 모습 같다’ ‘이곳에서 존재하려면 특별한 기능이 있어야 한다’ ‘영상 속의 주인공은 배울 부모가 없다’ 등등…


21세기 디지털가상 공간 게임의 냉혹한 매뉴얼을 낯설게 일러주는 이 작업의 작가는 독일의 미디어아트 거장인 하룬 파로키(1944~2014)다. 3년전부터 영화·미디어아트의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재구성해 기획전시를 벌여온 미술관 쪽이 올해 선정한 초대작가다. 게임영상들은 지난달부터 차린 파로키의 한국 첫 회고전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일부분으로 <평행>연작이란 이름이 붙었다.


전시제목이 암시하듯 파로키는 글로벌시대 우리 삶을 덮고있는 이미지의 작동방식과 소외된 노동의 실체를 독특한 영상 몽타주 방식으로 탐구했다. 베를린 영화아카데미를 나와 평생 독립영화와 미디어아트 작업에 몰두했던 작가는 전세계의 전쟁, 노동 현장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전혀 다른 맥락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주된 작업방식으로 삼았다. 기승전결의 시나리오로 구성된 기존 다큐나 영화의 서사를 거부하고, 문예비평가 발터 베냐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처럼 수많은 이미지들의 짜깁기와 재해석을 통해 우리시대를 규정하는 시각 질서의 본질을 밝히려 했다. 옛적 기록필름부터 영화, 동영상, 게임물에 이르기까지 영상들의 파편들을 낯설게 엮어 이미지 시대의 실체를 드러내려했던 파로키의 작품 세계는 2000년대 이래 국내외 영상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에서는 게임 영상과 더불어 90년대 이후 그가 끈질기게 천착해온 세계 각 도시의 노동현장에 대한 몽타주 작업들을 함께 볼 수 있다. 특히 7전시장을 천장에서 내려온 16개의 스크린들로 가득 채운 채 상영하는 <노동의 싱글 숏>(2011-17) 다채널 영상은 파로키와 부인 안체 에만이 2011년부터 시작한 워크샵 프로젝트로, 세계 16개 도시의 다기한 노동현장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요리를 하거나, 기계로 무언가를 찍어내고,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거나, 범법자를 잡는 치안 활동까지 세부적인 노동의 면면을 투영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도시 속에서 타인의 노동을 유심히 보지 않는다. 작가는 이 영상 속에서 반복되는 타인들의 노동의 세부를 포착하면서 우리 삶을 떠받치고 유지시켜주는 노동의 일상성을 서정적인 느낌까지 안겨주는 짜깁기의 미학으로 풀어내고 있다. 스크린의 미로 속을 방황하는 느낌을 받으며 감상하는 여러 노동행위들의 단면은 자연스럽게 삶과 노동 자체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낸다.


7전시실 깊숙한 곳에 놓인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과 이 전시장 입구 벽에 별도 프로젝션 영상들로 붙은 <리메이크-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또다른 그의 역작으로 19세기말부터 최근까지 전세계 각 도시 직장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영상들을 각각 모은 것이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나 1936년 만든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등에 찍힌 노동자들 무리의 모습들은 21세기 노동자 무리들의 영상과 엮이며 시공을 초월한 삶과 노동의 지속성을 일러준다.


파로키의 작업들은 첨단 영상기술을 상상력에 끌어들여 전세계적 소통의 예술을 주창한 백남준의 작업들과 흥미롭게 비교된다. 충돌하거나 이질적인 영상 이미지들의 창조적인 조합을 통해 지금 이시대의 정치적 문제, 노동현실의 문제를 새롭게 숙고하는 정치적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21세기 비디오아트의 새 돌파구를 연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 원문기사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8724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