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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뒤샹 展 ㅣ국립현대미술관

by 아트래블* 2019. 3. 19.

뒤샹의 <미국인에게 보내는 공개장> 그리고 마르셀 뒤샹 展 ② 리플릿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 展 ①  https://artravel.tistory.com/205





뒤샹의 〈미국인에게 보내는 공개장〉



나는 어디쯤 끼어 있을까 곽덕준 ‘10개의 계량기’와 뒤샹 ‘미국인에게 보내는 공개장' 中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3XX66100030



1917년, 세상이 러시아혁명으로 발칵 뒤집혔다면 미술계는 뒤샹(Marcel Duchamp)의 〈샘(Fountain)〉이라는 작품으로 발칵 뒤집혔다.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에 남성용 변기 하나가 덩그러니 등장했다. 말 그대로 그냥 변기였다. 하단부에 사인 몇 글자를 적어 놓은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변형도 찾아볼 수 없는 변기 그 자체이다. 그나마 ‘R MUTT’라고 적힌 사인은 뉴욕 변기 제조업자인 리처드 머튼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뭔가 아름다움을 만끽하려고 찾은 전시장에 등장한 변기를 보고 제일 먼저 경악한 것은 주최 측이었다. 어느 공중변소에서나 볼 수 있는 남성용 변기를 떼어다 ‘샘’이란 제목으로 올려놓았으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전시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는데 결국 주최 측에 의해 〈샘〉은 전시 기간 내내 전시장 칸막이 뒤에 폐기되었다. 한마디로 변기 취급을 받았다. 주최 측은 저급하고 불결하다는 이유로 전시를 거부했다. 이에 대해 뒤샹은 〈미국인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6달러라는 참가비를 낸 모든 화가는 작품을 전시할 권리를 갖는다. 〈샘〉은 아무런 거론도 없이 종적을 감추었고 전시에서 제외되었다. 〈샘〉을 거부한 것은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가? 혹자는 그것이 부도덕하고 상스럽다고 말한다. 혹자는 그것이 단지 화장실 용구의 모사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샘〉은 부도덕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화장실 용구 상점의 진열장에서 볼 수 있는 부품일 따름이다. 그것을 직접 자기 손으로 제작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화가가 그것을 선택했다. 평범한 생활용품을 사용하여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관점 아래, 그것이 갖고 있던 실용적 의미가 사라지도록 그것을 배치했다. 이리하여 이 소재의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 냈다. 화장실 용구 설비품을 모사했다고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다. 미국이 만들어 낸 유일한 예술품은 바로 이 화장실 용구들과 교량들뿐이기 때문이다.


〈샘〉에게서 당장 느낄 수 있는 감흥과는 상관없이 적어도 ‘공개장’의 몇 가지 근거는 공감이 간다. 먼저 변기를 부도덕하고 상스러운 무엇으로 본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미술은 아름다운 것을 묘사해야 한다는 통념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른바 상식적인 미의 기준으로 본다면야 가슴과 엉덩이가 기형적으로 크게 묘사되어 있는 구석기 시대의 여인 조각상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다.


하지만 구석기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풍요와 다산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표상이었다. 어느 누가 이 비너스를 미술에서 제외시킬 수 있겠는가? 그만큼 아름다움이라는 가치 자체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할 수 없는 상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설사 누가 보아도 아름답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예술의 표현 대상에서 배제될 필요는 전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 나가는 전쟁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변기보다도 몇 천 배 이상은 더럽고 추한 것이 인간의 전쟁일진데 미술의 역사에서 추앙받는 작품 중에 전쟁을 그린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가 직접 만들었는가의 문제도 미술의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 뒤샹에 의하면 레디 메이드, 즉 기성품을 그 일상적인 환경과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면 본래의 목적성을 상실하게 되고 단순히 사물 그 자체의 무의미함만이 남게 된다. 즉 미(美)는 발견해야 한다는 근대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주장한다. 직접 만들었지만 사물을 그대로 베낀 것과 비록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특정한 시공간에 그것을 있게 함으로써, 즉 화가가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하고 의미를 느낄 수 있게 한 것 중에 어느 것이 진정한 창작일까?


이제는 뒤샹의 〈샘〉을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국에서 미술계 인사 500명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작품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뒤샹의 〈샘〉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참고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2위,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 사진이 3위,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4위, 마티스의 〈붉은 화실〉이 5위를 차지했다. 이미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 자리를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화가들에게 예술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곽덕준의 〈10개의 계량기〉도 아마 뒤샹의 영향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사실 뒤샹의 〈샘〉 그 자체에서 어떤 감흥을 느끼지는 못한다. 기성품을 특정한 공간에 둠으로써 새로운 의미가 창조될 수 있다는 발상을 제공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서의 이해만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샘〉에서 어떤 실존적인 감흥을 얻을 수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특수한 조건 속에서 〈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을지도 모른다.



마르셀 뒤샹ㅣ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ㅣ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ㅣ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