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o there

도쿄에 대한 끄적거림 - 긴자, 우에노, 아사쿠사

by 아트래블* 2018. 6. 11.

긴자거리가 시작되는 유라쿠초역은 한문으로 풀어쓰면 有樂町로 '즐거움이 있는 마을' 정도가 된다. 긴자는 에도막부의 화폐 주조창자리인데(銀座) 지리적 핵심 요충지라서 일본 정부의 전시 행정적 노력이 집약된 지역이다.


개항 당시의 불평등 조약을 개선할 수 있는 명분은 일본의 정치, 사회, 제도, 문화가 서구와 마찬가지로 합리적이 되었고 이제 초기 조약의 목적을 상실했다는 주장이 가장 적절하겠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입헌정부를 위한 헌법을 공포하고, 이와쿠라 사절단을 1년여 동안 유럽, 미국에 보내 문화 등을 공부시키고, 건축과 도로를 서구의 눈높이에 맞도록 개선하는 노력을 벌인다. 그러한 노력이 집중된 전시행정적 공간이 바로 긴자 거리이다.


원을 그리는 철도(야마노테)노선을 기준으로 신바시-유라쿠초역 서쪽은 관공서 위주의 개선이 이루어 졌다면 반대로 신바시-유라쿠초역 동쪽은 상업-경제적 근대화 노력이 집중되는데 그곳이 긴자거리다. 참고로 히비야 공원은 예전에 ‘사스마번’의 다이묘가 도쿄에 머물던 자리다. 그 자리에 ‘로쿠메이칸’ 이란 외국인 전용 숙소와 제국 호텔등이 건축되고, 일본 국회나 귀빈을 위한 영빈관 등도 이쪽에 위치하게 된다.


긴자의 유명한 길을 '주오도리(中央通-도리는 일본어로 길을 의미)' 라고 하는데 당시 도쿄에서 가장 넓은 길로 한국의 광화문에 해당한다. 길은 신바시의 긴자에서 유라쿠초, 아키하바라, 우에노까지 연결되는 8차선도로인데 이 길을 중심으로 일본 초기의 벽돌건물들이 등장하고 노면에는 전차가 깔리고 긴자의 밤을 밝히기 위해 나중에 전등으로 바뀌게 되는 가스등도 설치되게 된다.


에도시대 초닌(상인계급의 호칭)들의 문화는 왁자지껄하게 '보는 문화' 인데 가부키가 그렇고, 스모가 그렇고, 벚꽃놀이, 심지어 불구경과 홍수 구경등 구경을 에도 상인들 만큼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었고, 그래서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긴자에 도입되면 도쿄 전역의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다.


메이지 시대, 그 후 다이쇼 시대(일본 천황의 연호는 메이지-다이쇼-쇼와-헤이세이 순) 도쿄에서 가장 세련되고 선호되었던 데이트 코스중 하나는 밤에 긴자의 거리를 산책하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에도 사람들이 구경을 그렇게 좋아해서 에도인들은 구경해서 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비숫하게 화려한 귀족문화의 유산이 짙은 교토는 '입어서 망하고', 상업이 발달한 인근 오사카는 '먹어서 망한다' 는 말이 생겨날 정도다



긴자 거리의 상징은 버드나무인데 주오도리를 확장하면서 거의 베어내고 철도역 인근의 좁은 지역에 남아있다. 반대로 초닌들의 지역 시타마치의 상징은 '나팔꽃' 으로. 더 나아가 도쿄도(도쿄는 ‘시’라고 부르지 않고 ‘도’라는 특별 행정구역이고 따라서 시장이 있지않고 도쿄도지사가 있다)를 상징하는 꽃은 '벚꽃'이며 일본 황실의 상징은 유명한 '국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다.


일본의 초닌의 주택은 목조 주택으로 화재에 몹시 취약했고 한번 일어나면 다닥다닥 붙은 주택을 타고 삽시간에 번져서 잿더미를 만들었다. 메이지 시대 도쿄의 아사쿠사, 간다(고서점 거리로 유명한), 니혼바시(시타마치) 등지에서는 주기적으로 큰 화재가 발생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메이지 천황이 막부를 몰아내고 교토에서 에도성으로 입성하는 날에는 화재의 위험 때문에 도쿄 전역에 불을 사용하는 상점, 식당가는 영업을 중지시키는 포교를 내릴 정도였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관동대지진 때 10만명이 사망한 것도 지진에 의한 건물 붕괴가 아닌 화재로 인한 사망자가 몇 배는 많았다는게 정설이다. 


왜냐면 지진이 일어난 시각이 정오 식사시간대였기에 점심을 지으려고 모든 가정에서 불을 때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 목조건물이 다닥다닥 붙은 모습은 긴자에서 3정거장정도 떨어진 '츠키시마' 라는 곳에서 볼 수 있다. 


긴자의 건물들을 벽돌로 짓고자 한 것은 서구에 대한 근대화에 대한 강박적 과시도 있었지만 벽돌 건물이 화재에 대해 강하리라는 잇점도 있었다. 물론 실제 화재가 났을 때 벽돌 건물들도 화재에 취약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이전의 목조건물에 비하면 그 피해는 적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벽돌 건물 역시나 관동대지진 당시 미스코시 백화점의 벽돌건물은 ‘찬란하고 장엄하게 타올랐다’는 기록도 있다.


시부야가 신촌, 강남역 분위기라면 긴자는 청담동, 명동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온다. 연령대도 긴자쪽이 훨씬 높고 스타벅스가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준다면 도토투는 스탠다드 팝이나 재즈를 틀어준다. 스타벅스에서는 시끄러워서 책을 읽기 그렇지만 도토루는 조용하고 중년의 부부들도 많이 와서 차를 마실 정도이다. 스타벅스는 남향으로 낮에는 눈이 부셔 창가에 앉는 것이 힘겹지만 도토루는 북향이라서 낮에 창가자리에 앉아 멀리 뻣어나간 긴자거리를 구경하기 매우 좋다.



일본 도쿄 여행의 기본이자 필수코스, 우에노에 관한 이야기


한국에 외국인 친구가 놀러오면 어디가 필수 코스일까. 먹고 마시는게 급하더라도 일단 경복궁과 용산의 국립박물관 같은 곳을 한번은 데려가게 된다. 도쿄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우에노 공원이다.


우에노 공원은 원래 ‘간에이지’라고 막부의 공식 불교사찰 자리였는데, 막부가 죽었을때 명복을 빌어주었고 6명의 막부가 뭍혀있는 곳이라 전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곳이 어떻게 공원이 되었는지를 보려면 막부정치 말기의 상황을 조금 알아야 한다.


사쓰마번은 오늘날 규슈의 남서쪽, 일본의 최남단인 가고시마현인데 조선시대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을 함경도로 보냈듯, 봉건영주인 다이묘 중에서 가장 막부와 사이가 껄끄러운 자들을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냈었다. 더구나 일본 최남단은 서구에서 온 항해자들이 일본해안에 최초로 도달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흑선이라는 서양의 배를 가장 빨리 접하고, 신물물(네덜란드 학문인 난학)을 먼저 도입하는 곳도 역시 이 지역이었다. (이런 성격의 또 하나의 지역이 '조슈번'인데 오늘날 야마구치현으로 '시모노세키' 가 유명하다.)


일찍부터 서양 문물과 제도를 습득해 '존왕양이' (천황을 떠받들고 위협하는 서구를 몰아내자)를 내걸고 막부타도를 외치는데 비교적 근대화된 징병제도와 신식무기를 기반으로 사쓰마-조슈 세력은 에도로 진격하게 된다. '도카이도'(東海道)를 따라 올라와 위 지도의 시나가와를 지나 에도성(오늘날 황궁자리)을 접수하는데 막부 지지파가 마지막까지 버티던 자리가 ‘간에이지’ 사찰, 즉 우에노 공원 자리다. 막부는 우에노공원 터에, 사쓰마-조슈 군대는 우에노 왼쪽, ‘혼고’라는 지역에 터를 잡았는데(혼고 지역에 오늘날 도쿄대학 캠퍼스가 자리하고 있다) 혼고에서 신식 대포로 간에이지를 공격 사찰터를 초토화 시켜버린다.


한동안 방치되던 이 넓은 땅은 용도를 찾지 못하다가 메이지 정부가 수습된후 일본 최초의 공원이 되고, 일본 최초의 박람회 장소가 되며, (벽돌건물, 전등, 엘리베이터, 전차등 신물물은 여기서 소개되고 긴자거리에서 꽃피게된다) 일본 전통 문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세워지게 된다. 우에노 공원엔 국립중앙박물관은 물론, 국립서양화박물관, 국립과학박물관등이 모여있는 박물관의 공원이고 도쿄에서 벚꽃이 가장 화려하게 피는 벚꽃축제의 장소이기도 하다.


우에노 공원의 상징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인데 사이고는 일본인들에게 사랑받는 열혈남아의 대표로 손꼽히기도 한다. 막부 타도시 사쓰마-조슈의 군대를 이끈 장수로 근본주의자, 원리주의자이다. 사이고 측은 일본혼을 되살리기위해 서양을 더욱 배척하고 몰락해가는 사무라이의 사기를 높여주며, 일본 사절을 박대한 조선을 정복해야한다는 '정한론' 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울분에 찬 사무라이 분노의 배출구로 이용하자는 임진왜란 직전 토요토미의 전략과도 유사) 


이의 반대측 온건파는 '오쿠마' 를 중심으로 서양문물을 배우는 사절단의 이름이기도 한 '이와쿠라' 와 우리에겐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 가 있다. 온건파의 주장은 정한론을 배척하는게 아니라 지금은 일본의 국력이 미약하므로 나중을 기약하자는 방법론상의 차이였지만 사이고는 이를 참지 못했고 (이런식으로 개량주의자들에게 끌려다니면 결국 일본혼은 서구에 먹히게 될 것이다) 나중에 내란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사이고의 내란은 천황을 겨눈게 아니라 천황을 둘러싼 온건파를 겨냥한 것이기에 일본인들의 사랑은 변치않았고 실패한 내란의 주인공이지만 독특하게도 동상까지 세워 기념하게 된다. 이 사이고 다카모리는 예전에 톰 크루즈가 나온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일본측 장수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내막을 모르면 반란 수괴의 동상을 세워준다는게 이해가 안되지만 원래 이 동상은 황궁에서 가까운 도심 한가운데의 '히비아' 공원에 세워질 예정이었지만 이를 껄끄럽게 여긴 온건파측이 우에노로 보냈다고 한다. 



아사쿠사에 관한 이야기


우에노 공원이 관(官)의 전폭적 지지와 관리로 오늘날 박물관의 지역으로 성장했다면 우에노에서 3정거장 떨어진 아사쿠사와 그 곳의 절 '센소지' 는 초닌의 관심과 애정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 지역이다. 아사쿠사는 스미다가와 강변에 있는데 아사쿠사에서 배를 타면 니혼바시를 지나 오다이바까지 갈 수 있다.


막부정치가 막판을 치닫을 무렵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물가는 폭등했으며 경제는 엉망이었다. 이를 타게하려고 막부가 들고 나온 정책이 '덴포 개혁' 인데 경제적으론 검약을 강조하고, 문화적으론 건전함을 들고 나오며, 사회적으로는 흐트러진 신분질서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앞서 에도 초닌들의 문화는 왁자지껄하고 축제라도 있으면 무절제하고 밤새도록 홍등가를 기웃거리는 유흥 문화라고 했는데, 막부는 성내에서 이런 유흥문화를 금하면서 니혼바시에 있던 홍등가를 에도성 행정구역의 밖인 '요시와라' 로 추방한다. (이때 니혼바시에 있던 가부키 극장도 모조리 쫓겨나고 영화 '왕의 남자'나 '패왕별희' 가 그렇듯 분칠한 배우와 연기자들은 주업이 연기라면 부업이 매매춘이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때부터 요시와라의 위치가 오늘날 아사쿠사 바로 위쪽의 논밭이 펼쳐진 들판이 된다.


아사쿠사의 발달과 환락가 요시와라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애주가와 애연가가 정부에서 막는다고 술 끊고 담배를 끊지 않는 것처럼 정부에서 건전한 여가생활 캠페인한다고 해서 유흥가 출입을 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구나 막부에 삐딱한 초닌들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니혼바시의 상인들은 여가를 즐기기위해 니혼바시에서 배를 타고 스미다가와 강을 거슬러 올라 아사쿠사에서 내려 '센소지' 를 한번 들러보고, 그 위 요시와라에 가서 밤새도록 유흥의 밤을 보낸 후 새벽녘 다시 '센소지' 에 들러 잘못을 사하는 나름의 시간을 보낸 후 생업을 위해 니혼바시로 돌아오곤 했다고 전해진다.


한쪽은 막부를 등에 업은 '간에이지'가 있고 다른쪽은 초닌들의 솔직한 문화를 등에 업은 '센소지' 가 있다. 전자는 잘꾸며진 잔디밭과 으리으리한 박물관이 우뚝우뚝 솟아잇으며 후자는 낡은 건물과 좁은 골목길뿐이지만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이 남아 있다. 전자는 도쿄의 대표적인 공원 우에노가 되었고, 공원 임에도 그 흔한 잡상인하나 볼 수 없지만 후자는 ‘센소지’라는 절로 여전히 남아있으면서 절 바로 옆으로는 소박한 놀이공원이 있고 일주문을 지나 절의 경내 바로 코앞까지 기념품가게와 먹거리 장터가 있다. 


도쿄를 방문한다면 꼭 가봐야할 두장소이지만 보면 볼수록 재밌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