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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대한 끄적거림 - 롯폰기 그리고 용산

by *아트래블 2018.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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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폰기


롯폰기는 원래 ‘밤의 거리’다. 긴 설명이 필요없을만큼 주말 아침에 가게 되면, 홍대에서 보는 일상적(?)인 모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세련된 레스토랑과 클럽, 바가 몰려 있어서 다른 도쿄의 번화가보다 분위기가 고급스러움을 줌은 물론 낮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매우 흥이 넘치는 거리다. 그 중심에는 6성급 특급호텔과 여러 미술관, 쇼핑 타운 등이 몰려 있는 복합 시설 롯폰기힐스 등으로 인해 롯폰기가 도쿄 예술의 성지로 탈바꿈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롯폰기는 본래 클럽들이 밀집한 지역, 야쿠자가 활동하는 거리로만 알려져 있던 지역이었다. 1960년대 말 롯폰기 지역에서 디스코가 유행해 일본 사람들과 외국인들에게 유명해지면서, 도쿄의 대표적인 나이트라이프 스팟으로 자리잡았다. 1989년 말 일본의 버블 경제가 붕괴되면서 시들어가던 롯폰기의 상권은, 2003년 롯폰기 힐스의 개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일본 최대 규모의 복합 단지 롯폰기 힐스를 시작으로 2007년 도쿄 미드타운, 도쿄 국립 신미술관 등이 연이어 롯폰기에 개관을 하면서, 도쿄의 대표적인 명소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곳이 문화의 중심가로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롯폰기 아트 트라이앵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3대 미술관이다.모리그룹이 만든 모리타워의 최고층인 53층에 위치한 모리미술관, 주류회사 산토리에서 설립한 산토리뮤지엄, 그리고 도쿄국립신미술관은 좋은 기획의 전시와 풍부한 콘텐츠를 제공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도쿄여행 중 세 미술관의 전시와 콘텐츠를 모두 꼼꼼하게 돌아보려면 적어도 2~3일은 쏟아 부어야 할 정도다.


이러한 롯폰기도 예전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주한미군이 떠난 서울 용산기지가 우리나라에 반환돼 대규모 공원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은 다들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가 경기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남게 되는 243만m² 부지에 조성되는 최초의 국가 도시공원인 셈이다. 2003년 한미 정상 간 용산기지 평택 이전 합의 이후 2007년 제정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에 의해 추진되어 왔는데 이후 2011년 종합기본계획 수립, 2012년 국제현상설계 공모를 거쳐 현재 공원조성 개발의 밑그림을 그리는 단계다. 


여담이지만 이러한 예전 용산 미군기지터의 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듯 싶다. 

한강을 앞에 두고 북으로는 북한산과 남산이 버티고 있는 용산은 군대가 주둔하기 적합한 천혜의 요새인 곳이다.


조선 말기 임오군란(구식 군대의 처우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군인들의 항명사태)이 일어났을 때 이른 수습하지 못한 조선 왕조는 청나라에 대한 파병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때 청군을 이끌고 온 이가 위안스카이(원세개)이고 이들은 도성 남쪽 지금의 용산 미군기지터에 자리를 잡게된다. 


그 후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은 러일 전쟁을 앞두고 일본 기지가 되어 용산 일대 115만 평을 병참기지로 사용했고, 1945년 광복 이후에 이 땅은 주인만 바뀌어 역시 외국군 부지로 활용되었는데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오키나와의 미 7사단이 그 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또한 남북 분단후엔 미군의 핵심기지가 되었고 12.12사태때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하극상을 일으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느라 쳐들어 간 육군본부가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롯폰기

그렇듯 우리나라에 아픔의 역사와 선진 외국 문화의 본거지였던 용산이 있다면 일본에는 바로 이곳 롯폰기가 있다. 일본 육군본부는 원래 황궁 바로 아래쪽 히비야공원에 있었다. 히비야 공원터는 사쓰마번 영주의 도쿄 거주지인데 막부가 몰락하면서 빈 공터로 남아있었는데 주로 일본군대의 연병장과 사열 등 행사의 용도로 사용되어졌다. 황궁 앞에 군사시설이 보기 싫었는지 이 연병장은 히비야 공원으로 재개발되고 육해공의 부대는 좀더 서쪽인 현재의 롯폰기 자리로 오게 된다. 


이러한 롯폰기에서 일어난 유명한 사건이 바로 2.26 쿠데타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5.16 쿠데타를 연상케 한다. (5.16 혁명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혁명이 아닌 쿠.데.다.다) 1936년 민간 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느낀 일본군의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상당수를 살해하지만 천황의 복귀명령으로 쿠데타는 실패하게 된다. 


이후 일본의 민간 정부에 의한 활동은 크게 위축되고 대내외 정책에는 어김없이 군부의 입김이 강해지게 되면서 군국주의의 시발점이 되고만다. 그 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결국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미 점령 사령부가 위치한 곳이 바로 롯폰기이다. 가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느끼겠지만 정말 용산의 분위기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많은 미군을 상대해야 하므로 롯폰기에는 윤락가와 (미군만을 상대하는 매춘부를 '온리걸'이라고 불렸다) 와 미국적 팝문화(각종 밴드와 재즈바 등)가 전파되는 등 전후 롯폰기의 유행을 선도하는 문화는 이 시기에 활짝 꽃이 피게 된다.


롯폰기의 남서쪽, 지도의 7시 방향에 있는 도쿄의 대표적인 도시 시부야는 롯폰기와 함께 일본군과 미군들이 놀다가는 이전 도쿄의 밤을 밝히던 유흥길목이었다. 70년대 말 시부야에 '세이브109'라는 백화점을 필두로 '시부야 패션'이라는 서구적이 패션이 유행하는데 미군을 상대로 하는 유흥문화가 영향을 많이 미쳤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롯폰기를 대표하는 건물로는 록본기힐스(모리타워가 있는 곳), 도쿄미드타운, 국립신미술관(박물관이 아니라 전시를 주로하는 갤러리 같은 곳으로 박물관을 원한다면 우에노공원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바로 이 가운데 국립신미술관이 예전 일본 육군본부 자리이고 일본의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시도한 장소이기도 하다. (국립신미술관 바로 위가 아카사카 이궁)


참고로, 롯폰기와 이 국립신미술관은 여러가지 연유로 해서 많은 이야기를 낳기도 한다. 지난 2015년 7월 하시마(端島·별칭 군함도)섬을 포함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한국과 일본은 격렬한 외교전을 벌였었다. 우리나라가 강력하게 반대하자 일본은 “강제노역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정보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측이 담당 부처의 반대를 무시하고 군함도 등에서 멀리 떨어진 도쿄(東京) 롯폰기 국립신미술관의 옛 일본군(軍) 건물에 군함도 등의 정보센터 설치를 밀어붙여 한국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일이다. 롯폰기 지역은 그렇게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여러 이슈메이커가 되고있다.


국립신미술관 야경


국립신미술관 国立新美術館


물결치는 듯한 유리파사드가 48,000m²의 실내공간을 에워싸고 있는 이 미술관은 자체 소장품이 전혀없이 국가인정 미술단체를 위한 전시공간(10실)과 큐레이터가 기획하는 전시공간(2실)로 구성된다. 


외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물결치는 듯한 글라스 커튼월은 좌우로만 물결이 치는 것이 아니라 상하로도 볼록한 곡선으로 되어 있어 매우 다이나믹한 모습을 연출한다. 글라스 커튼월은 자연광을 최대한 유입하면서도 인체에 해로운 자외선과 과다한 일사열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지진다발지역인 일본의 지형특성을 감안하여 면진장치에 의한 안전대책과 지하자연환기에 의한 에너지 절약 대책, 빗물의 재이용 등 에너지 면에서도 최대한 자연을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글라스 커튼월은 밤이 되면 실내의 빛이 유리를 통해 밖으로 퍼져 나와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한다.


롯폰기 지역은 언덕으로 되있고 과거 사찰과 묘지가 몰려있던 장소인지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가 아닌 대부분의 길은 골목도 좁고 길도 복잡한 편인데 도쿄 한가운데 이렇게 쇠락한 골목길을 찾는 재미 역시 남다르다. 참고로 일본에 유명한 전망대 가운데 무료로 갈 수 있는 신주쿠의 도쿄도청 전망대(서쪽), 도쿄타워(동쪽)등이 있고, 다들 잘 알다시피 롯폰기힐스의 전망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