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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을사늑약의 현장

by *아트래블 2018.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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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을 증언하는 중명전 덕수궁 중명전에서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을사늑약 중명전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나오는 정동극장 뒤 옛 미국대사관과 나란히있는 건물이 하나 보인다. 


일제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체결한 을사늑약의 현장이자 1907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던 뜻깊은 곳인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이다.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 이라는 뜻의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은 1897~1899년경 황실도서관으로 탄생했다.


보통 근대기의 양옥식 건물들을 보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라고 흔히들 알고 있는데, 정동에 있는 많은 근대식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말기에 근대화를 이룩해 나가려는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지은 건물들이 대부분이으로 중명전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건물이다.



중명전 현판



궁궐의 도서관으로 지어졌다가 고종의 집무실로도 사용된 곳.


중명전 현판에 쓰인 글자를 자세히 보면 날 일(日)변에 달 월(月)자가 아니라 눈 목(目)변에 달 월(月)자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밝을 명(明)자가 아니라, 밝게 볼 명(眀)자이다.


왕이 정치를 함에 있어서 진정성 있게 혜안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에서 밝게 볼 명(眀)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을사늑약 중명전

(위) 2017년 재복원된 현재 모습으로 2010년 때와 달리 지반을 낮춰 계단을 추가로 설치한 것이 보인다.

▼ 본래 중명전 모습 (바로 아래 ⓒ문화재청)  /  ▼ 2010년 복원모습 (맨 아래 ⓒ문화재청)



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후 일제의 훼손으로 외국인 클럽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민간에 매각되기도 했지만 2006년 문화재청이 인수한 뒤 2007년말부터 3년 정도 건물 복원작업과 상설전시실 조성 작업이 진행되어 2010년 1차 재개관 / 2017년 2차 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 전시관으로 공개되었다.


덕수궁 중명전 복원 사업 관련한 아래와 같은 기사도 있다.


[관련 기사] 중명전 복원 잘못됐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53799.html


을사늑약 중명전



을사늑약을 증언하는 곳, 중명전


1905년 11월 18일 새벽, 중명전에서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강제된다.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중명전을 침범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을사늑약 중명전


주권 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투쟁


<을사늑약> 이후 주권 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민족적 투쟁이 시작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각국의 원수들에게 친서를 보내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렸다.


전국 유생들은 항일 상소운동을 벌였으며, 민영환·조병세 등은 자결로서 항거했다.


종로거리의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고, 학생들도 자진 휴교하였다.


또한 전국에 의병이 조직되어 민종식, 최익현 등 각지의 많은 유생들이 의병 운동을 일으켰으며,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며 항일 여론을 고조시켰다.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의 역사



1897년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의 황실 도서관으로 계획되어 1899년 준공되어졌는데 당시 명칭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한성부 건축기사로 초빙된 미국인 다이(J. H. Dye)의 설계로 1층 서양식 건물로 지어진 전각 중명전은 근대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고종(광무황제)의 의지가 잘 담겨져 있다.


을사늑약 중명전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이듬해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회랑이 있는 2층 벽돌 건물로 재건축되어졌는데 당시 건물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Sabatin)이 맡았다.  


이후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대화재가 일어나 고종이 이곳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1906년경부터 '중명전(重明殿)'으로 불리게 됐다. 



을사늑약 중명전


1904년 4월 고종이 이곳으로 이어하면서 편전 겸 폐현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이듬해인 1905년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중명전은 외국인클럽 등 민간 영역에서 활용되면서 내외부가 많이 변형되었다.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뒤 다시 재건하여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주로 쓰이다가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63년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고종과 중명전


1904년 4월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일어난 대화재는 고종과 중명전이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함녕전에서 발생한 불길이 경운궁의 주요 전각을 모두 태워버리자 고종은 황급히 중명전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 1907년 아들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약 3년 반 동안 고종은 주로 중명전에서 국사를 처리하였다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다. 그 후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6년 문화재청에 관리 전환하여,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 중명전')으로 일반에 공개하였다.


이후 2017년 20세기 초 평면도를 바탕으로 오래된 시설을 보수하고 조경공사 등으로 더 입체적인 전시물과 전시 기법을 통해 재정비 후 재개관을 하였다. 


전시실과 별도로 중명전 정원은 20세기 초 중명전 권역의 평면도를 검토하여 당시의 지반 높이를 반영하여 석축과 계단이 복원됐고, 조경 정비도 같이 이루어졌다.


중명전 내부의 전시 공간은 4개로 나뉘며 각각의 주제는 덕수궁과 중명전, 을사늑약의 현장, 을사늑약 전후의 대한제국, 대한제국의 특사들이다.



▲ 1전시실에서는 덕수궁과 정동 일대를 축소 모형으로 제작하고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하여 개항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명전과 덕수궁 권역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하였다. 


▲ 2전시실에서는 당시 의복을 고증해 입힌 극사실 인물모형들을 사용해 을사늑약 체결장면을 재현함으로써 체결 현장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했다. 


▲ 3전시실에서는 늑약 체결 전후로 숨가쁘게 돌아가던 국제정세와 국내외 조약 체결 반대의 움직임을, ▲ 4전시실에서는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대한제국 특사들의 활동을 각종 영상으로 재구성하였다.


중명전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전시관 모습



덕수궁 중명전


덕수궁 중명전


을사늑약 중명전

을사늑약 조약문과 일제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 체결 현장을 영상과 음성으로 연출해 보여준다.



덕수궁 중명전

 ‘고종황제의 고뇌, 그리고 헤이그’에서는 일제 침탈에 맞서 자주적 의지를 보여 주고자 했던 대한제국 선포 모습, 당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던 헤이그 특사단의 안타까움을 삽화와 그래픽으로 소개한다. 



헤이그 특사의 도전과 좌절


고종은 <을사늑약>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한다.


비록 특사들은 회의장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각국 대표들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고, 『만국평화회의보』와 각국 신문기자단이 모인 국제협회에 한국 정부의 입장을 알리는 등 외교적 노력을 펼쳤다.



덕수궁 중명전


덕수궁 중명전


덕수궁 중명전




덕수궁 중명전


덕수궁 중명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