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회고전 '지칠 줄 모르는 수행ㅣ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
우리 추상미술의 1세대로 잘 알려진 박서보 화백은 '묘법' 즉, 묘사하는 방법이란 뜻의 작품을 한평생 추구해 온 작가이다.
그의 회고전이 국림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오는 9월 1일까지 열린다.
박서보 회고전 :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시기간 : 2019-05-18(토) ~ 2019-09-01(일)
전시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박서보-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초기에는 캔버스에 연필로 드로잉을 하고 오일을 바른 뒤 또 연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비가 내리는 것처럼 수없이 내리 긋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후에는 뾰족한 삼각형 모양이 반복되는 필치가 커지고 오일 덩어리가 뭉치면서 행위는 더욱 단순화되고, 한지를 여러겹으로 바른 뒤 수도 없이 눌러 주름지게한 최근 작품은 거친 질감을 가득 담고 있다.
묘법(描法) Écriture No.01-77 1977, 르몽드지에 연필과 유채, 33.5x50cm, 작가 소장
그렇듯 무엇보다 그림이 먼저라 늘 말하는 박서보 작가.
박서보의 추상화들은 언뜻 봐선 뭔지 모르지만 주로 자연에서 착상한다는 그의 단색화는 서구의 미니멀리즘처럼 단순하고 반복적이지만 그보다는 자연미가 느껴지는 추상화에 가깝다.
회화(繪畵) No.1 1957, 캔버스에 유채, 95x82cm, 개인 소장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연필을 잡기도 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박서보 작가는 1950년대 온통 불모지이던 우리 미술계에 낯선 추상미술을 선보인 이래 일평생묘법描法을 명제로 정제된 추상미술을 선보여왔다.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 입학하자마자 전쟁을 겪고 1962년부터 교단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명예교수로 퇴임하기까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온 지금도 여전히 화업을 잇는 그를 단순히 ‘단색화의 거장’이라고 칭하는 것은 어쩐지 부족하다.
박서보 작가는 1957년 한국 앵포르멜Informel(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서정적 추상화의 경향) 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한 현대미술가협회의 주요 멤버로 활동한 뒤, 1961년 세계청년화가 파리 대회에 참가하며 한국전쟁의 참혹성을 표현한 원형질 시리즈를 전개했다.
묘법(描法) Écriture No.190227 2019, 130x170cm Pencil and oil on canvas
단색화로 더 잘 알려진 묘법 회화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캔버스에 희끄무레한 오일 페인트를 바르고 물감이 마르기 전에 연필을 반복적 으로 긋는 작업(연필 묘법)을 시작으로, 1980년대 이후 본격화한 후기묘법(지그재그)에서는 물에 불린 한지 또는 닥종이를 캔버스 위에 겹겹이 올리고 유색 물감을 칠한 뒤 굵은 연필심으로 긁거나 밀어내는 행위로 요철을 만든다.
불어로 에크리튀르ecriture(쓰기)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이 그림은 가장 간결한 형태의 긋는 행위를 통해 고도의 절제된 세계를 표현했다고 평가받는다.
묘법(描法) Écriture No.931215
작가에게 그리기는 마음을 비우는 명상이요, 자신을 갈고닦는 일이라 말하는 이유다.
"묘법은 도道 닦듯이 하는 작업이에요. 그림이란 나의 생각을 토해내는 마당이 아니라 비워내는 마당이죠. 엇비슷해 보이는 ‘묘법’ 안에서도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왔다고 단언합니다."
사실 ‘묘법’의 출발이 동양적인 체념에서 비롯했다. 연필로 비슷한 움직임을 끊임없이 반복해 그린 초기 ‘묘법’ 시리즈는 “아들이 3살 때 글쓰기 공부를 하다가 지쳐 마구 낙서하는 것을 보고 체념의 정서를 그린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생각을 비워내는 묘법작업은 디지털 세계에서도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며 지금도 새로운 작업을 꿈꾸고 있게 한다.
묘법(描法) Écriture No.071021 2007,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95x130cm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에서 열리는 '박서보-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는 1950년대 '원형질'부터 1970년대 본격적으로 선보인 '묘법', 2000년대 '후기 묘법', 아흔을 바라보는 올해 작업한 신작까지 전 시기 작품과 아카이브 16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1970년 전시 이후 선보인 적 없는 설치 작품 '허상'도 전시장에 나온다.
원형질(原形質) No.1-62 캔버스에 유채, 163x13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전시는 5개 공간에서 연대기 순으로 작업을 소개한다.
첫 번째 공간 '원형질'은 한국전쟁 직후의 불안과 고독 등을 담아낸 '회화 No. 1'(1957)부터 1961년 파리 체류 이후 발표한 '원형질' 연작을 소개한다.
다음 '유전질' 공간은 1960년대 후반 옵아트, 팝아트 등 서구미술 영향을 받은 '유전질' 연작과 1969년 달 착륙과 무중력 상태에 영감을 받은 '허상' 연작을 다룬다.
비키니 스타일의 여인 1968, 캔버스에 유채, 130x89cm, 개인 소장
어린 아들의 서툰 글쓰기에서 착안, 캔버스에 유백색 물감을 칠한 뒤 연필로 선 긋기를 반복한 '초기 묘법'과 닥종이를 재료로 사용한 '중기 묘법' 연작이 각각 3, 4번째 공간에서 펼쳐진다.
마지막 '후기 묘법' 공간에는 막대기, 자 등으로 일종의 고랑을 만들어 깊고 풍성한 색감을 강조한 대표작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70년 활동 자료를 통해 세계 무대에 한국 추상미술을 소개하려 애쓴 예술행정가이자 교육자로서의 면모도 소개한다.
묘법(描法) Écriture No.080618 2008,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95x130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