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에 들어서자 지름 2.5m의 거대한 공이 전시장 입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면에 칙칙한 듯한 색깔.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공이 땀을 흘리는 것이 보인다. 부르르 떨기도 하고 안에서 소리도 들려오고 이 공이 의미하는 게 쉬이 다가오지도 않고, 설명을 해준다해도 100%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거대한 공 주변을 맴돌게 된다.
이어 '천천히, 산책하듯 걸어 주세요' 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 복도를 지나 들어간 전시공간에는 조명이 침침하게 켜져 있을 뿐이다. 얼른 지나가려고 움직이자, 마치 안개가 피어오르듯 내 몸을 따라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생겨나고, 산속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 마치 몸으로 만드는 산수화 같게만 보인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에 길이 15m의 긴 공간을 자꾸 왔다 갔다 하게 된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개관 30주년을 맞아 서울 서소문 본관에서 미술관을 대표하는 소장품을 통해 소장품 기획전 ‘디지털 프롬나드’를 갖고 있다. 소장품은 미술관의 얼굴이라는 점에서 어떤 미술관이든 10년 단위의 큰 생일을 맞으면 과거를 반추하고 나아갈 방향을 짚기 위해 소장품전을 기획하곤 한다.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천경자, 박생광, 김수자, 이불 등 한국 현대 미술사의 주요한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한 서울시립미술관의 4700여 소장품 중에서 자연과 산책을 키워드로 선정한 소장품 30점을 보여주는 단순한 전시에서 벗어나 더 욕심을 내서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소장품과 미술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 신진 작가의 커미션(작업을 주문하는 것) 작품도 함께 전시해 투 트랙으로 구성했다.
둘을 묶는 연결고리는 ‘산책’을 뜻하는 프랑스어인 ‘프롬나드(promenade)’다.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로 하여금 서울시립미술관의 서소문본관 2-3층의 전시장과 계단, 복도를 산책(프롬나드)하듯 거닐면서 전시에 참여하게끔 하는 이번 전시의 기획의도가 전시제목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소장품 4700여점 가운데 자연과 산책을 키워드로 한 30점을 골랐다. 또 박기진 배윤환 최수정 등 신진 작가 10명이 신작을 통해 ‘디지털 환경에서 산책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경험이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가, 미래에도 인간은 여전히 예술을 창작할 수 있는가’를 탐험한다.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요즘, 예술이 가야 할 바를 과거를 뜻하는 소장품과 미래를 의미하는 신진 작가의 작품을 연결해 고민하겠다는 전시다.
하지만 투 트랙의 전시는 정교하지 못한 기획과 디스플레이 방식 탓에 상호 침투하거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듯 보였다. 기라성 같은 작가의 소장품 30선과 매치가 안 된다는 점이다. 소장품이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마냥 그렇게 외떨어져 있어 보였다.
소장품 30선의 작가는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등 작고 작가에서부터 시작해 생존 작가도 박서보, 성능경, 김호득, 이불, 구동희 등 40∼80대로 세대 간 스펙트럼이 넓다. 그러다 보니 같은 자연도 김환기의 추상, 유영국의 반구상, 이대원의 표현주의 등 표현기법이 다양하다. 분단의 상처를 녹인 이세현의 ‘붉은 산수’, 페미니즘 풍경으로 해석되는 이숙자의 보리밭 등 주제별로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소장품은 어떤 맥락도 없이 2층의 2개 전시공간에 흩뿌리듯 진열됐다. 박생광의 ‘무속’은 전시 주제와 맞지 않는데도 1호 소장품이라는 이유로 맨 앞에 나왔다.
크기도 작아 존재감이 약한 소장품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가운데 지름 2.5m의 비정형 공을 만들고 거기서 사운드와 땀을 연상시키는 수증기가 나오는 박기진의 설치작품 ‘공’이 주인공처럼 들어차있다. 조영각의 신작 ‘깊은 숨’은 별도 공간에 마련됐는데, 인공지능 딥러닝, 빅데이터 등을 이용해 소장품에 대한 관객의 느낌을 새로운 이미지로 만들어준다. 젊은 작가들의 커미션 작품들은 음성인식과 로보네틱스, 위치 기반 영상 등 최신 기술을 망라해 동시대 미디어 아트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Sasa[44], <18개의 작품 18명의 사람, 18개의 이야기와 58년>,
미디어 설치, 모니터, 헤드셋, 시트지, 가변크기, 2018, 그래픽 디자인: 슬기와민
Sasa[44]는 설치, 출판, 사진,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면서 '같은 아이디어가 어떻게 다른 외형의 결과로 귀결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만화책, 신문, 위키피디아 등에서 수집과 조사를 거쳐 가공한 정보들을 데이터베이스화 하거나 메타-서사를 교차/조합하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신작 <18개의 작품, 18명의 사람, 18개의 이야기와 58년>은 사람과 작품의 이야기, 사람과 사람의 만남, 작품과 역사의 관계, 이야기의 역사성 등을 질문하며, SeMA 미술관과 30년 동안 다양한 접점을 이루는 작품, 사람, 이야기와 역사에 대해 질문하며 시작된 작품이다. 작가는 미술관의 소장품이 몇 개의 층위에서 몇 개의 방법으로, 몇 명과 관계를 맺으며 만들어지고, 관객은 이 소장품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관람객 각자가 역사의 프롬나드를 통해 산책하기를 제안한다.
작가는 선별된 소장품 30점 목록으로 작품의 제목과 제작년도를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키워드 검색하여 동일한 년도와 단어로 이야기를 찾았다. 검색이 불가능한 단어를 제외하고 18명의 작가의 작품으로 최종 선택된 18개의 뉴스를 각 작품 제작년도에 태어난 관객을 섭외, 기사를 낭독하고 녹음하여 전시장에 설치하고 낭독한 관객과 해당 작품을 함께 사진 촬영하여 전시한다. 또한 전시장 입구에는 디자이너 슬기와 민과 협업하여 제작한 데이터 그래픽을 벽면에 설치한다.
배윤환,<스튜디오 B로 가는 길>,뉴미디어,싱글채널 HD 비디오, 15분,400x300cm(가변크기), 2018
배윤환은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 미술사 속 고전 명화, 영화 속 시퀀스 등의 다양한 이미지에서 촉발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산발적이고 일화적인 일상에서 시작해서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초대형 3면화/2면화라는 전통적인 회화의 방식을 차용하되, 만화책이나 카툰이라는 인접 장르, 캔버스 대신 합판이나 장판과 같은 소재를 믹스 매치함으로써 전통적인 회화의 클리세를 비껴나간다.
신작 <스튜디오 B로 가는 길>은 배윤환이 직접 쓴 단편소설 「오두막」을 모티브로 그림 한 장, 오브제 하나까지 모두 직접 그리고 만들어서 완성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질까’라는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실제 애니메이션의 전개는 창작의 과정만큼이나 복잡하고 불안정하며 쉼 없이 변한다.
작가가 빚어놓은 ‘마음 덩어리’들이 놓여있는 작업실은 애니메이션 속에서 도박장, 지옥, 수련장, 놀이터, 동굴과 같이 그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작업실을 향해 가는 여행(모험) 속에서 벌어지는 생성, 실패, 실망, 환희, 좌절, 도달, 종결, 시작과 같은 종잡을 수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난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작업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마음의 덩어리들의 생성과 이동에 대한 기록이다.
최수정, <불, 얼음 그리고 침묵>, 미디어 설치, 시멘트에 복합매체, LED 필름디스플레이 260x260x400cm, 2018
최수정은 회화를 기반으로 설치나 오브제와 같은 매체를 결합시켜왔다. 캔버스이라는 전통적 회화의 조건(평면성)과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메타-회화적 방식들을 고민함으로써 캔버스 자체가 하나의 물리적인 오브제로 설정하는 확장을 통해 공간과 회화, 그리고 내러티브와 그 내러티브를 작동시키는 이미지의 사이를 탐색해왔다.
신작 <불, 얼음 그리고 침묵>은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접촉과 부재, 시각기계와 청각기계, 매체와 정보, 기억과 죽음, 0과 1, 생성과 소멸 등과 같이 ‘불과 얼음’처럼 서로 상반되는 대립쌍들의 변주를 가져온다. 최수정은 그리스 신화를 현대의 매체 환경에 대입함으로써 정보의 유한성, 인간의 기억과 죽음의 문제, 인공기억의 삭제 가능성, 그 모든 과정에서 존재하는 변이, 오류, 돌발, 왜곡, 간섭 그리고 잡음을 문명과 자연의 쓰레기장, 소멸과 생성의 중간지대이자 잡음과 침묵이 오가는 유적지-패총(선사시대의 쓰레기장, 조개 무덤)으로 만들어낸다.
점멸하는 눈의 빛(시각기계-나르키소스)과 목소리(청각기계-에코)가 동시에 접촉하는 표면은 화석을 연상시키는 조개들과 오랜 역사의 매체들이 파편적으로 섞인 소음으로 가득 찬 퇴적된 조개무덤이다. 회화를 주매체로 사용하는 작가가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SeMA 개관30주년 기념전 《디지털 프롬나드》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30점)과 디지털미디어 뉴커미션(10점)의 만남, 그 새로운 해석․몰입․참여
▒ 전시기간 2018. 6. 12.(화)~8. 15.(수)
▒ 전시연계행사 학술심포지엄 2018.7.10.(화) 세마홀
▒ 전시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3층
▒ 홈페이지 http://sema.seoul.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