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칼럼] 어느 판사의 생각
친구야, 보내준 메일 잘 읽었다. 첨부한 동영상도 보았어. 전부 내가 한 판결을 비난하는 내용이더구나. 너는 철학자니까,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과 형사 법정의 현실을 모르니까, 그런 이야기에 끌릴 수도 있다고 봐. 친구니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할게. 이런 얘기 공개적으로는 안 하지만 너한테는 말하고 싶다. 날 손절할지도 모른다고? 그래, 할 땐 하더라도 일단 들어는 봐.
검사 욕해야지, 왜 판사를 비난해? 나더러 어쩌라고!
법정이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는 곳이라고? 아니야. 몰라서 하는 오해야. 민사 법정은 몰라도 형사 법정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아. 너도 그렇고, 네가 보내준 동영상에서 떠든 이들도 그렇고, 다 그렇게 오해한 탓에 나를 비난하는 거야. 나는 현실을 알아. 내가 부장판사야. 형사합의부 재판장이지. 경력이 20년 넘어. 나는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이 아니야. 단 하루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 그건 전적으로 틀리진 않지만 대체로 틀린 말이야. 판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검찰이 기소한 형사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고 유죄인 경우 적절한 형량을 주는 것이지. 검찰과 피고인 측이 법정에 낸 증거와 정황과 논리를 보고 모든 걸 판단해. 법정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상관하지 않아.
우린 검사가 기소한 사건만 취급해. 검사가 기소하지 않으면, 아무리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 대통령과 가족과 측근들의 범죄 혐의는 덮고 야당 정치인과 가족만 탈탈 털어 처벌하는 게 정의로운 법 집행이냐고? 물론 아니지. 대통령이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법제도를 악용하는 것 아니냐고? 그래, 맞아. 그렇지만 그게 판사 책임은 아니잖아. 검찰을 욕해야지 왜 법원을 비난해? 말했잖아. 검사가 기소하지 않은 사건은 형사 법정에 오지 않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기소당한 야당 정치인과 가족들한테 무죄를 선고하라고? 그게 정의라고? 아니야.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판사는 증거를 보고 법리에 따라 판결해. 정치적 목적으로 기소했다 해도, 증거를 조작하고 참고인을 회유해 허위 진술을 받았다고 해도, 검찰이 낸 증거와 증언이 허위라는 걸 피고인이 증명하지 못하면 유죄 선고를 할 수밖에 없어. 증거 조작 여부와 증언의 허위성 여부를 판사는 직접 조사하지 않아.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그럴 의무가 없어. 처리해야 할 사건이 많아서 안 그래도 바쁜데, 어떻게 그런 일까지 하겠어?
유시민 칼럼, 음성으로 듣기 https://youtu.be/9zy6Cnfrgpk
판사들은 옛날부터 스스로 알아서 늘 그래 왔어
나만 그런 게 아냐. 지금 판사들만 그런 것도 아냐. 판사는 대부분 언제나 그렇게 해왔어. 조선총독부 시절부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쳐 민주화 시대까지 세상은 달라졌지만, 판사는 달라지지 않아. 판사가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넣은 게 아니야. 검사가 독립운동가를 기소했고 그들이 실정법을 위반한 혐의를 입증했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했던 거라고. 우리 대법원은 정치인 조봉암한테 사형 선고를 했어. 이승만이 바로 집행했지. 인혁당 관련자들한테도 사형을 선고했어. 박정희가 다음 날 새벽 바로 집행했지. 김대중한테도 사형 선고를 했어. 전두환이 감형해 미국에 보내서 살았지만, 대법원은 김대중을 죽이라고 했어. 왜? 검찰이 기소했고 김대중이 무죄를 증명하지 못했으니까. 피고인이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면 판사는 유죄 선고를 할 수밖에 없어. 전두환이 총칼로 협박해서 그랬던 게 아니야. 협박할 필요가 없었어. 굳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니까.
그 사람들한테 대법원이 재심 무죄를 선고했지 않았느냐고? 그건 세월이 지났으니까, 시대가 달라졌으니까, 사형을 선고한 증거와 증언이 고문과 조작으로 만든 가짜였음이 밝혀졌으니까 그렇게 한 거야. 유죄를 선고한 원심 판사가 잘못했다고 인정한 게 아니라고. 판사의 잘못을 인정한 것처럼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일 뿐이야. 다시 말할게. 형사 법정은 진실을 밝히는 곳이 아니고, 판사는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이 아니야. 친구야. 나더러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라고 말하는 네가 버겁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사람이 많아서 사는 게 쓸데없이 고달픈데, 너라도 그런 말 안 하면 안 되겠니?
판사들이 보수적이라 진보 세력한테 적대적이라고? 천만에! 우리가 지금의 야당 사람들한테만 유죄 선고를 했어? 아니지. 전두환·노태우도 집어넣었잖아. 박근혜·이명박도 중형을 내렸잖아. 그 사실을 왜 모른 척하지? 우린 누구든 검찰이 기소하고 범죄 증거가 확인되면 교도소에 보낸다고. 노무현도 검찰이 기소해서 혐의를 입증했으면 집어넣었을 거야. 윤석열·김건희 부부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검찰이 기소하고 증거가 분명하면 징역형 내릴 거라고.
대통령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데 그냥 내버려두고 낙선한 야당 정치인한테만 징역형을 주는 건 정의롭지 않다고? 내 생각은 달라. 윤석열의 범죄를 덮었다는 이유로 이재명의 범죄도 봐주는 건 더 큰 불의를 저지르는 거야. 범죄자 둘 모두를 놓치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처벌하는 게 더 정의로운 것 아닌가? 그게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 하는 사람들이 현직 대통령과 배우자도 검찰이 기소하게 만들어야지. 내 재판부에 배당되면 범죄의 증거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으면 합당한 벌을 줄게.
헌법과 법률로 전지전능한 권한 갖게 된 최고 엘리트
그 정도 하고 다음 이슈로 넘어가마. 일개 판사가 대선에서 국민 절반의 표를 받았고 지금 국민 지지율이 독보적으로 높은 차기 대선주자의 피선거권을 박탈한 행위는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국민의 선택권을 제약해 주권재민 원리를 짓밟았다고? 난 인정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런 판결을 했겠어? 난 판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우리나라는 법치국가라고들 하는데, 법치국가가 뭐야? 법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이지. 법치국가에서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해야 해. 누구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돼. 지지율 일등 차기 대선주자라고 해서 범죄 혐의가 입증되었는데도 무죄를 줘야 하나? 선거법 위반 혐의가 입증되어도 형량을 벌금 백만 원 아래로 해야 하나? 그건 아니지.
맞아. 나는 일개 판사야. 하지만 형사법정에서 유무죄를 가리고 형량을 결정하는 능력은 내가 최고야. 유권자 2000만 명을 모아 놓는다고 해서 나보다 더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어. 나는 전교 1등만 모이는 특목고에서도 1등을 다툰 사람이야. 대한민국 최고 대학 최고 학과에서 법을 공부했고 사법시험을 초고속 합격했지. 연수원 성적이 좋아서 판사가 되었고, 20년 동안 온갖 사건을 다루어 봤어. 우리 헌법과 법률은 일개 판사인 나한테 정치인의 피선거권을 박탈할 권한을 주었어. 나는 대한민국 최고 전문가로서 그 권한을 행사했을 뿐이야. 주권자인 국민의 뜻? 판사는 국민 여론을 살필 필요가 없어. 물론 살펴도 되지만 의무는 없다는 말이야. 판사가 국민 여론을 따라야 하는 게 아니야. 국민이 판사의 결정을 따라야지. 국민은 판사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그 조건에서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헌법에 따르면 그래.
내가 피고인에 대한 정치적 편견 때문에 중형을 선고했다고? 서로 다른 맥락에서 한 말을 하나로 엮어서 거짓말로 판단했다고? 피고인이 위협을 느끼게 만든 수많은 중앙정부 공문서는 무시하고 가장 온건한 문장으로 쓴, 사건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공문서 하나만 증거로 채택했다고? 그건 그 사람들 생각이고, 나는 생각이 달라. 형사 재판에서 누구 생각이 중요한가? 판사 생각이 중요하지.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여론을 살필 거라면 판사가 왜 필요해? 사법시험 제도나 변호사 자격시험을 왜 만들었어? 북한식으로 아무나 판사 자리에 앉혀 놓고 인민재판 하면 될 것 아니야?
판사들은 거의 다 비슷해, 상급심 기대할 것 없어
법정에 나온 증거의 의미와 가치를 해석하고 평가할 권한은 온전히 판사의 것이야. 헌법이 누구도 판사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어. 그런 점에서 ‘판사는 하느님과 동기동창’이라고 할 수 있어. 법정에서는 판사가 하느님이지. 사법부라는 건 가상의 존재야. 대한민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건 사법부가 아니라 자신의 법정에서는 신과 같은 권능을 행사하는 3200여 명의 판사들이지. 우리는 지지율 1등 차기 대선후보도 합법적으로 제거할 권능이 있어. 그런 결정을 할 때는 인간계를 넘어 신계의 일원이 된 느낌을 맛보곤 하지.
그래, 내가 그렇게 판단했어.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등인 피고인의 국회의원 자격을 빼앗고 차기 대통령 선거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게 옳다고. 대한민국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왜?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형사 법정에 선 그 자체가 문제거든.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겠어? 판결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판결문은 적당히 쓰면 돼. 검사가 내세운 증거만 채택하고 검사의 논리를 인용하면 돼. 나한테는 그럴 권한이 있어. 판사들이 대개 나하고 비슷하니까 상급심에서 엎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특이한 판사도 더러 있지만 많진 않아. 특이한 판사는 어떠냐고? 쓸데없는 데 집착하지.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하라”거나,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되었을 때만 범죄 사실을 인정하라”거나, “열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을 억울한 피해자로 만들지 말라”거나, 뭐 여하튼 그 비슷한 걸 원칙이라고 하면서 지키려고 해. 옳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의미가 없는 소위 ‘공자님 말씀’일 뿐인데 말야.
무죄추정의 원칙은 ‘법조가족’에게나 해당되는 것
현실은 어떠냐고? 검사가 유죄를 입증해야 하는 게 아니라 피고인이 무죄를 입증해야 해. 그걸 못하면 유죄야. 대한민국의 형사법정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 아니라 유죄 추정의 원칙이 지배하지. 증거 없이도, 심지어는 범죄 장소와 시간을 검찰이 특정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유죄 선고를 해. 국가정보원 비밀요원이 작성한 보고서도 무죄의 증거일 경우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한 사실임을 입증하지 못한다면서 배척하고, 주가조작 전과가 있는 형사 피고인의 증언이 유죄의 증거인 경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허위임이 증명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채택하는 식이지. 왜 그렇게 하느냐고? 굳이 설명해야 하나? 너 같으면 기소되어 법정에 선 피고인과 사법시험을 합격했고 연수원 성적이 우수해 검사가 된 대학 동창 중에 누구를 더 믿겠니?
판사들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경우가 없는 건 아냐. 하지만 드문 예외지. 예컨대 현직 판사가 기소되면 모든 것을 법과 원칙대로 해. 조금이라도 의심이 남으면 무죄로 하고, 증거가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할 때도 무죄를 줄 수 있는 법리를 받아들이지. 너도 알잖아? 전직 대법원장, 또 그 사람하고 가까운 판사들이 소위 ‘사법농단’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다 무죄를 받았다는 거. 그런 사건에서는 공판 검사도 열심히 하지 않아.
꼭 판사한테만 그러는 건 아니야. 현직 검사나 판검사 출신 변호사가 형사 피고인으로 오는 경우에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해. 그래서 딸이 몇백만 원 장학금을 받은 교수는 징역형을 주지만, 아들이 50억 원을 받은 전직 검사는 무죄를 주는 거야. ‘법조가족’이잖아. 어쩌다 실수한 건데, 헌법과 형사소송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재판을 해야지.
민주주의로 만든 권력인데, 당신들이 날 뭘 어쩌겠어?!
친구야. 판사가 뭐 그리 특별한 사람 아니라는 거, 나를 봐서 너는 잘 알잖아. 그런데 형사 법정이 뭐하는 곳인지는 모르는구나. 걱정해 줘서 고맙다. 네가 나를 손절하더라도, 친구로서 걱정해 주었다는 사실은 기억할게. 그렇지만 나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를 욕하는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할 방법은 없거든. 야당이 나를 탄핵해서 직무를 정지시킨다고 해도 같은 법조가족인 헌법재판관들이 돌려놓을 거야. 법정에서 마스크를 착용했기 때문에 법조 기자들도 길에서는 나를 알아보지 못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은 오래전 것이라 별 의미가 없어. 판사 일이 싫증나면 옷 벗고 나가서 변호사 할 거야. 마음만 먹으면 대형 로펌에 가서 돈 많이 벌 수 있어. 많진 않지만 공무원 연금도 받지. 나 욕하는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낸 세금으로 나한테 연금 주는 거야. 욕해도 상관없어. 그래서 혼자 이렇게 말하곤 하지. “내가 한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래서 당신들이 나를 뭐 어쩔 건데?!”
친구야. 너네 대학 교수들 시국선언문 봤어. 네 이름도 있더구나. 우리 모교 교수들은 아직 안 했던데, 거기도 언젠가는 하긴 하겠지. 대통령과 검찰과 법원이 법치주의를 내세워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고 썼던데, 난 동의하지 않아. 오늘의 모든 상황은 2022년 3월 9일 대한민국 국민이 선택한 것 아닌가? 현 정부는 네가 찬양해 마지않는 바로 그 민주주의가 만든 권력 아닌가? 민주주의 타령은 그만하면 좋겠다.
다음 달 동창회 모임에서 웃는 얼굴로 만나기를 기대하며, 이만 줄인다.
이 글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
누구를 연상한다면 그건 의도나 우연의 산물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이었을 따름
* 뱀다리: 얼마 전 나온 법원 판결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내가 판사라고 상상하면서 감정을 이입해서 썼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해’는 ‘동의’가 아니다. 판사가 왜 그랬는지 파악한다는 뜻이다. 하나 더.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다. 이재명 관련 사건 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한 판사를 연상하게 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의도한 바가 아니며 우연의 산물 또한 아니다. 그저 불가피한 일이었을 따름이다.”
* 뱀다리의 뱀다리: 위 뱀다리에서 따옴표로 묶은 부분은 197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하인리히 뵐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문장을 오마주한 것임을 밝혀둔다.
글 출처 :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