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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도스] 김수 작가 '사랑의 단상'

by 아트래블* 2018. 9. 25.

■ 전 시 명 : 김수 ‘사랑의 단상' 展

■ 전시장소 :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7길 37 Gallery DOS (갤러리 도스)

■ 전시기간 : 2018. 8. 29 (수) ~ 2018. 9. 4 (화) 


김수 작가 '사랑의 단상'




 작가 김 수 


김수는 서울과 파리에서 서양화와 조형예술을 전공하였다. 


1998년 첫 개인전 ‘표류’를 시작으로 “반복 점, 몸지도, 떠다니는 몸, 손으로 짜낸 이야기, 관계-줄다리기” 라는 제목으로 서울, 바젤, 파리에서 개인전을 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고양스튜디오, 시안미술관 레지던스,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시각예술협회 레지던스에서 작업하였으며, 자연 환경, 여행 등 삶의 경험을 통해 영감을 얻는다. 


몸과 마음의 관계를 표현하는 바늘구멍 텍스트, 이미지, 오브제를 이용한 드로잉과 다양한 매체의 설치작업을 하고 있다. 


She has studied painting and fine arts in Seoul and Paris. From the first her solo show in 1998 [Deriver] at the Boda Gallery in Seoul, she made solo shows as a title of “Repetition, Points, Cartographie du Corps, Floating Body, Knitting Story with Hands, Relationship-Tug of War” in Seoul, Paris and Basel. She has participated diverse Artist Residency Programs as Korea National Museum of M





 전시내용


  김수 작가는 여행자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약간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어디론가 떠나며, 돌아온 후엔 여행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근 그녀는 아이슬란드에 다녀왔다. 이후 그녀의 작업을 참고할 때, 그녀는 빙하와 사랑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 


얼마 전 그녀의 방에 가서 종이로 된, 유리로 된, 나무로 된 빙하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가끔 그녀의 방에 놀러갈 때마다 방의 풍경이 바뀌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 그녀는 빙하를 보았고, 나는 빙하를 보았던 그녀를 보는 것이다. 그녀는 나와 빙하의 매개자이다. 그녀는 외부와 빙하의 매개자이다. 


그녀는 자신이 강렬히 보았던 것, 온몸으로 체험했고 사랑했던 것과 외부의 매개자인 것이다. 여행자의 눈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그녀의 방에 다녀올 때마다… 방문자의 막막한 가슴에 어떤 가능성이 발견되는 건 그 때문인 것 같다.



김수 작가

‘이끼달’ 모조지 위에 연필, 120x120cm, 2017


김수 작가

‘먼지 같은 생각들을 위한 실험실-생각과 행위 사이에서 버려진’ 뻐꾸기시계와 아날로그 시계축,  전동모터, 51x90x50cm, 2017


김수 작가

‘이끼 달 위의 열 번의 낮과 밤’ 밀가루(폐기 밀가루, 대한제분 제공), 나무구조, 디지털프린팅 미러볼 위에 비디오 프로젝션, 440×350×270cm, 2017


김수 작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터널’ 종이판넬 위에 9B연필, 37x51.5cm, 2015


사랑의 단상 _ 김효나 (소설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은 내가 그것을 처음 읽은 2004년 이래 나에게 있어 가장 밝은 책이다. 『밝은 방』을 읽으며 나는 나를 이해했고, 끝없이 한곳을 응시하는 나의 눈을 이해했고, 그 바라봄의 이면에 존재하는 거대하고 완고한 어두움을 인정했다. 


인간과 삶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어떤 훌륭한 소설이나 영화보다 사진에 대한 이 작은 이론서가 나의 불가해하던 영역을 밝게, 거의 눈부시게 깨우쳐 주었다. 요즘 말로 하면 ‘인생책’인 셈이다. 책장에서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응원군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마음이 밝아지는.


그런데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이 밝은 책이, 롤랑 바르트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쓰였다는 것을. 


극도로 어두웠고, 끝내 어두움으로 남았던 시기. 밝아지지 못했고, 밝아짐을 또한 거부했고, 밝아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알 수 없었고, 영원히 알 수 없는 끈적한 어두움에 파묻힌 시기.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의 죽음 이후 2년. 또한 그의 마지막 2년. 고통, 애도, 슬픔… 따위의 단어는 얼마나 텅 빈 것인가. 


단지 그 ‘시간’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2년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밝은 방』을 썼던 것이다. 이 책은 사진에 대한 이론서이기 전에, 죽은 어머니의 존재에 다다르고자 하는 개인적 노트였던 것이다. 지적 통찰로 가득 찬 활력적인 발화인 동시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의 분리를 겪어내는 이의 애타는 중얼거림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랑의 단상』 36페이지에서 바르트는 이렇게 썼다.


“홀로 찻집에 앉아 있다. 누군가가 와서 인사한다. 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원해지며 영합의 대상이 된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부재하고, 그래서 나는 나를 노리고 있는 이 세속적인 영합으로부터 그가 지켜 주도록 마음속에 그를 소환한다. 내가 빠져들어가는 듯한 이 유혹의 히스테리에 대항하기 위해 그의 ‘진실’(그는 내게 그런 느낌을 준다)에 호소한다. 내 세속적인 처신이 마치 그 사람의 부재 탓인 양 그의 보호를, 귀환을 간청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찾으러 오듯이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나 이 세속적인 현란함으로부터, 사회적인 자만심으로부터 나를 구해주기를, 사랑 세계의 ‘그 종교적인 내면성과 장중함을’ 돌려주기를 간청한다. (X…는 내게 사랑이 그를 세속적인 삶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고 말했다. 파벌, 야심, 진급, 음모, 동맹, 탈퇴, 역할, 권력으로부터. 사랑은 그를 사회의 찌꺼기로 만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기뻐했다고.)”


 

『사랑의 단상』이 출간되던 1977년에 바르트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책의 집필 후, 죽음이 있었다(나는 그 순서를 꼼꼼히 따지고 싶다). 주요 집필은 1974년부터 1976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 기간 동안 파리고등연구실천학교의 세미나에서 강의했던 결과물이 이 책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단상』은 바르트의 저작 중 대중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책이기도 하다. 나 역시 『사랑의 단상』으로부터 바르트를 알았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오래 전 어느 날, 책의 첫 페이지 상단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지식의 아름다운 폭발.’ 『사랑의 단상』의 서문과 본문 사이 한 장의 페이지에 바르트는 이렇게 적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것이다: 어머니의 있음 속에서, 바르트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는 것. 책 속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지시되는 사람은 줄곧 ‘X…’라는 연인이지만, 연인과의 사랑이 가능하기 위한 밑바탕에, 세속적인 삶으로부터의 피난처인 사랑 세계를 지속적으로 구축하려 하는 삶의 의지와 욕망의 꿈틀거림 이면에, 그를 늘 가만히 바라봐주었던 어머니의 눈이 있었다는 것. 그녀의 죽음 후 짤막짤막하게 적어나간 메모 속에서 그는 뭐라고 했던가? 


“이제 내게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마저도. 그러면서 나는 ― 이건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지만 ― 말라버린 가슴 ― 아케디아(l'acedie)를 스스로 감지한다.”


말라버린 가슴은 말라버린 눈동자다. 말라버린 눈동자의 말라버린 표면엔 무엇도 비추지 않는다. 혹은 무언가 비추어진다면 그것은 거대한 공허일 뿐이다. 


또는 움푹 들어간 새카만 구덩이. 말라버린 동공의 표면엔 먼지가 쌓인다. 누구도 대신 그것을 훑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동공의 소유자는 그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반짝이는 눈동자로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 자신은 보이든 말든, 사랑의 대상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다. 본다는 것은 매우 적극적인 행위이다. 발견하고, 흡수하고, 이해하고, 이해하고자 하고, 마침내 간절히, 자신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행위이다. 


오래 전 남자친구는 밥을 먹다가 문득 내게 말했었다. 네가 없는 동안에도, 내게 자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바라봄의 대상은 어떤 사람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물일 수도 있고, 어떤 장면일 수도 있고, 어떤 말일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뒤섞인 어떤 순간일 수도 있다. 


내가 며칠 여행을 떠나겠다고, 그동안 우리가 즐겨하던 요리를 해 먹으라고 하자 그가 문득 쏘아붙이듯 그렇게 되물었던 순간, 나는 그 순간을 이후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나는 그 순간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먼 여행에서 돌아온 K는 내게 말했다. 여행 중에, 오래도록 사랑했던 옛 연인을 만났다고. 카페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눈물 흘렸다고. 순간이 머리에 그려졌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이별과 분리의 상처와 고통, 자기혐오… 과거를 뛰어넘어 변화된 현재의 지금 이 순간과 대면할 수 있을까. 변화된 지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기억의 맞은편」은 이미지와 텍스트가 짝을 이루는 구성으로 제작된 총 8점의 드로잉 연작이다. 상단에 배치된 드로잉은 어떤 장면을 연필로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고, 하단에 배치된 텍스트는 역시 연필로 그 장면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중 하나의 장면엔 검은 개가 웃고 있다. 웃고 있을 뿐 아니라 모자도 쓰고 있다. 웃는 검은 개에게 모자를 씌워주는 이는 손 부분만이 그려져 있다. 


검은 개는 누군가 모자를 씌워주어 웃고 있는가? 아니면 검은 개가 웃고 있었기 때문에 모자를 씌워준 것인가? 여기는 어디이며,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 검은 개가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림을 보며 나는 그런 것이 궁금해졌는데, 하단의 텍스트를 읽고 검은 개와 모자와 손의 관계를 연상할 수 있었고 나 역시 슬며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오직 작가만이 알아볼 수 있는 개인적인 관계망을, 작가는 그림과 글을 통해 외부와 나누고 있었다. 「기억의 맞은편」에서 작가가 선별한 8개의 장면은 작가가 사랑하는 순간들이었다. 사진으로 포착되었던, 살아가는 날들 속의 반짝이던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사진은 그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줄 모르기에, 작가는 사진을 그림과 글의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어머니의 사진을 끊임없이 탐색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얼굴을 사유를 통해서 그 윤곽을 그리고 싶고, 강렬한 관찰의 유일한 영역으로 만들고 싶다. 나는 그 얼굴을 보다 잘 알고, 보다 잘 이해하며, 그 얼굴의 진실을 잘 알기 위해 확대하고 싶다. 나는 세부 요소를 연속적으로 확대함으로써, 마침내 내 어머니의 존재에 다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